비가 지나갔다.
격렬했던 빗줄기가
세상을 한번 긁고 사라진 자리에
씻기지 않은 고독과
마르지 못한 어둠만이
작고 묵직한 앙금처럼 남아
조용히 가라앉아 있다.
모든 것을 비워낼 듯 퍼부었건만
텅 빈 자리는 오히려
잊히지 못한 기억들로 가득 차
물비린내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.
비는 멎었지만
차가운 땅 위에서는
아직 젖은 연기가 피어오르고
흐린 안개 뒤편에서는
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는
어떤 날들이
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.
그 기억들은
길가의 잡초를 닮았다.
비바람에 짓눌리고
수없이 밟혀 모양은 망가졌어도
뿌리는 뽑히지 않은 채
어디선가 다시 고개를 든다.
초라하지만 끈질긴 초록처럼
내 지난날도
사라지지 못한 채
다시 내 안에서 돋아난다.
세월이라는 바람에
겉은 씻기고 닳아버렸으나
비 온 뒤 눅눅한 오후처럼
내 안에 고인 기억들 위로
이름 없는 바람 하나 불어와
젖은 잡초를 흔들고
나의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.
말없이 감싸며
아직 남아 있는 무엇을
천천히 일깨운다.